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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승식의 다른 생각 (보관)

짧은 생각 사전과 단어장

신승식 2005.09.06 00:04 조회 수 : 26350

 
집 정리를 하다가 학부 초반에 쓰던 영어 단어장이 나왔다. 생물학 단어가 많은 걸로 봐서 아마 2학년 때인가 지각 심리학 들었을 때 원서 보면서 정리하기 시작했던 단어장인 것 같다. 그 뒤로 나의 단어장은 몇 번 쉬다 가다를 반복했고, 내 단어장은 노트였을 때도 있었고, 조그마한 수첩일 때도 있었다. 단어장에 단어가 늘어난다고 해서 단어 실력이 좋아지는 것도 아니었지만, 고등학교때부터 썼던 84년판 에센스와 대학 와서 새로 장만한 콜린스 코빌드가 너덜너덜해지고 어떤 페이지를 넘겨도 울긋불긋하게 색칠한 단어가 많아지면 웬지 그 어휘들이 내 머릿속 어딘가에 잠재되어 있을 것 같은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다 최근에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너무 영어 텍스트를 읽지 않았다는 것이다. 들어오는 것이 없으니 생산되는 것도 빈약할 수 밖에 없다. 읽는 책이 없이 어떻게든 잔머리로 끌쩍끌적 쓰는 글이 풍부할 리도 없고, 창조적일 리도 없다. 그래서 얼마 전부터 급한대로 Joe Clark의 Building Accessible Websites의 뒷부분들을 다시 펼쳐보았다. 그리고 날마다 조금씩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내가 그 책을 좋아하는 이유는 영어가 감칠나는 맛이 있기 때문이다. 보통 기술 서적들은 영어가 너무 평이하고 재미가 없다. 그런데 이 책은 기술 서적이지만 저자의 말투가 생생하게 살아있고 무엇보다 어휘가 풍부하다. 그래서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고 최근에 공부를 게을리 한 사람은 사전을 뒤적거리지 않으면 답답해진다. 그런데 사전을 뒤져봐도 때로는 없는 단어도 있고, 때로는 단어를 찾아도 여전히 알쏭달쏭한 경우도 나온다. 그래도 그 책은 읽을 때 리듬감이 느껴진다. 언어를 이용한 긴장과 이완, 휘몰아침과 풀어짐,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위트와 유머, 때로는 옆에서 나에게만 대단한 비밀을 알려주는 듯한 조심스러움과 대로변에서 길가는 사람들에게 제발 좀 들어보라고 큰소리로 외치는 간절함과 씩씩함이 끊임없이 교차된다. 그것이 비슷한 주제를 다루지만 평이하고, 글에 인간적인 숨결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목석같은 Maximum Accessibility와 다른 점이고 매력이다.

이제 전자 사전 시대가 되었다. 전자 사전을 사려고 최근에 좀 알아봤는데 아직 살 것인지 말 것인지 최종 결심을 하지 못했다. 각종 컴퓨터 사전, 인터넷 사전에 밀려 종이 사전은 먼지만 쌓여 있었는데 구석지에 처박아놓은 낡은 사전을 찾아 다시 단어를 찾고 색연필로 칠해보았더니 묘한 감흥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것을 쓰다 만 단어장에 옮겨적어 보았다. 예전의 글씨체가 나오지 않는다. 컴퓨터를 치는 데만 너무 익숙해졌다. 정성스럽고 예쁘게 필기하던 습관은 이미 오랜 기억 속에서만 남아 있었다. 요즘 중고등학생들도 독서 카드에 또는 스프링으로 묶여진 조그마한 연습장에 단어를 적어놓고 버스 안에서 졸면서 외울까? 아니면 MP3 어학 학습기와 전자 사전, 또 PMP, PDA 같은 것들에 밀려 더 이상 단어장이란 낱말이 죽어가는 말이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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