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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승식의 다른 생각 (보관)

책과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신승식 2004.02.29 21:20 조회 수 : 26773

 
태극기 휘날리며 영화 포스터오늘은 CMHV에서 영화를 보기로 한 날이었다. 어설픈 봄볕이 쏟아지는 일요일 아침 9시 반에 광화문에 모여 조조 프로를 보기 위해 계단을 오르락 내리락하며 뛰어 겨우 영화관에 도착하고, 각자 보고 싶은 영화를 선택해 영화관으로 들어갔다. 예전처럼 한꺼번에 똑같은 영화를 보지 않아서였던지, 비교적 모두가 만족할 만한 시간이었다고 하였던 것이, 모임으로서는 성공이었다.

5분 정도 늦게 들어간 태극기 휘날리며에서는 50년대 종로 거리를 배경으로 잘 생긴 장동건과 원빈이 나와 형제애를 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50년 6월 24일 토요일 밤에 장동건과 원빈의 가족들은 마치 내일 전쟁이 터질 것을 암시하듯 개울가에서 마지막으로 가족끼리의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어간다. 나는 6월 24일을 묘사한 부분을 매우 주의깊게 지켜보았다. 박완서의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도 아름답게 묘사된 전쟁 전날이 더 가슴이 아프고, 떨리고, 두려운 것은, 비극의 역사를 이미 알고 있는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전투 장면보다 더 무섭고, 공포스런 장면은 바로, 이 평화롭던 마을에 전쟁 소식이 전해지면서, 삶의 터전을 버리고, 목적지도 없이 피난을 떠나는 장면이다. 그리고 그것을 더욱 실감나게 만드는 것은 눈앞에서 쏟아지는 기관총이 아니라 먼 산 너머로 들려오는 포성과 하늘 색깔을 잠깐동안 붉게 만드는 섬광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비극은 도대체 전쟁의 이유와 목적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는 두 젊은이를 일시에 전쟁터로 내몰면서,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힘든 정신적 공포와 육체적 고통 속으로 관객들을 안내하였다. 전쟁은 실질적으로 아들과 같은 동생을 살아내보내기 위한 형만을 파괴한 것이 아니라, 모두를 급속하게 파괴하고 있었다. 그들은 인민군 포로를 생존 싸움에 붙이기도 하고, 무장해제한 인민군을 죽이기도 하고, 결국에는 한 동네에 살았던 이웃, 동생이던 [] (이름 까먹음.)를 죽였다. 이것이 모두 형이 동생을 구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글쎄, 아무리 가족과 혈통이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한 한국사회라지만, 남을 죽이지 않으면, 언제 어떻게 내가 죽을지 모르는 죽음의 공포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더욱더 야만적으로 자신을 키워나가야만 하는 전쟁 상황에서까지 얼핏 극히 이타적으로 보이고, 희생적으로 보이는 그 혈통과 가족이 그렇게 중요한 가치였을까? 총탄이 쏟아지는 극도의 공황 상태에서도 이일병, 정신 차리게를 외쳤던 70년대 배달의 기수에 나오는 완벽한 국군에 비해서는 전쟁 영웅의 인간성 파괴를 더 사실적으로 이야기해준다는 점에서 훨씬 현실 감각을 찾았으나, 그 어떤 이유에서든 그렇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총탄 사이를 마구 헤쳐다니는 형의 모습은 여전히 비현실적이고, 영화에 덜 빠져들게 만드는 요소였다.

태극기 휘날리며 영화 포스터태극기 휘날리며의 영문 제목이 Brotherhood라고 들었다. 박완서의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경험해보지 못했던 한국 전쟁에 대해 몸서리치는 간접 경험을 했다. Brotherhood에서도 총탄이 머리 위를 오가는 숨돌릴 틈도 주지 않는 연속적인 전투 장면을 통해 그런 경험을 했지만, 그래도 웬지 아쉬운 구석이 남는다. 50년대 인물이라기엔 너무 매끈하게 잘 생긴 두 남자 배우와, 오로지 동생을 돌려보내기 위해 전쟁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생존에 대한 본능조차 잊어버리고 너무나 용감하게 잘 싸우는 형, 그리고 형을 만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또역시 너무나 용감하게 인민군 진지로 뛰어가는 동생... 3년이나 계속되는 최악의 전쟁 속에서 뒤틀려버린 그들의 비극적인 운명과 비극적인 결말에 하염없는 눈물이 나오면서도 끝내 아쉬웠던 점은...  전쟁 속에서, 죽음의 공포 앞에서, 그리고 삶의 기본을 위협받는 극도의 공황 상태에서 그 어떤 인간도 목숨을 불사르는 영웅은 없다는 것을 잊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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