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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승식의 다른 생각 (보관)

책과 영화 파인만에게 길을 묻다

신승식 2004.05.20 07:14 조회 수 : 53139

 
파인만에게 길을 묻다 흰색 책표지요즈음 회사일, 그리고 과외로 하는 몇 가지 일들에 쫓기다시피 하여, 내가 진짜 좋아서 하고 싶은 일들을 할 여유가 없다는 것이 은근히 스트레스가 되었다. 진짜 좋아서 하고 싶은 일로는 마음껏 읽고 싶은 책을 보는 것, 보고 싶은 영화를 보는 것, 만나고 싶은 사람들과 만나 편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 마음껏 음악에 빠지는 것 등이다. 며칠 전에 회사 동료, 홍식과 같이 같이 퇴근하며 꽤 오래동안 같이 걷게 되었다. 나는 걸으면서 요즘에는 책을 못 보니(업무적인 것 말고), 생각이 단순해지고, 정서가 메마르는 것 같다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우리 집 근처에는 동네 서점 치고는 꽤 큰 중급 정도의 서점과 구멍가게 크기인 장학서적이 있다. 큰 서점은 문을 닫았을 것인데, 책이 많지 않은 장학서적은 그 때까지 문을 열어놓았길래, 무작정 들어가보았다. 그리고 즉흥적으로 재미있어 보이는 책 두 권을 골랐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파인만에게 길을 묻다(원제: Feynman's Rainbow)였다.

물리학이라는 난해하고 복잡한 이야기 때문에 혹시 소화하지 못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도 있었지만, 책 표지에 나온 학문과 인생 이야기라는 말에, 그냥 덮석 집었다. 나는 문과였기 때문에 파인만의 교재로 물리학을 공부한 적은 없었지만, 형이 가지고 있는 물리학 교재들 중에 파인만이라는 이름이 들어간 교재를 많이 봐 왔었다. 그리고 아인슈타인과 함께 20세기 최고의 물리학자에, 발레 공연에서 드럼을 치기도 하는 괴짜라고 하니, 어떤 사람일까 적잖이 궁금하기도 했었다.

글쓴이는 레너드 믈로디노프라는 파인만과 함께 칼텍(California Institute of Technology, 노벨상 수상자가 20명이나 나온 서부의 최고 명문 공과대학)에서 연구원으로 일했던 젊은 사람인데, 특이하게도 그는 물리학을 포기하고 현재는 시나리오 작가가 되었다. 글쓴이는 명문 버클리대에서 박사 학위를 따고, 그의 훌륭한 박사 학위 논문으로 인해 물리학의 최고 천재들이 다 모인 칼텍에 채용이 된다. 그러나 그는 그의 뛰어난 박사 학위 논문이 우연한 기회를 잘 잡아 생긴 것이 아니라, 그의 뛰어난 상상력과 천재성과 노력에 의해 나온 것이라는 것을 칼텍에서도 보여주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방황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눈에 비친 사람은 둘 다 노벨상 수상자이지만 정말 대조적인 리처드 파인만과 머레이 겔만이었다. 파인만은 자연에 존재하는 사물의 원리를 직관과 상상력을 동원해 찾는 것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바빌로니아인었고, 겔만은 정리되지 않은 자연에 엄격한 수학적 질서를 부여하고 조직화하려는 그리스인이었다. 파인만은 싸구려 학생 식당을 애용하고, 허름한 옷을 입고 다니며, 물리학 외에는 다른 학문에 대해서 별로 관심도 없고, 달가와하지도 않으며, 스트립 하우스에서 수학 문제를 풀기도 한다. 반면, 겔만은 아테네 신전이라는 품위있는 식당을 이용하고, 정장을 차려입고 다니며, 고대의 유물들을 수집하기도 하고, 새에 관심도 있다. 물리학의 세계에서도 파인만은 '파인만 다이어그램'이라는 자신만의 독특한 직관이 반영된 체계를 문제 해결의 도구로 제시하지만, 겔만은 '끈 이론'과 같이 비록 자연의 원리와는 맞지 않을 수도 있다고 비판받지만, 그것이 완성되었을 때에 세상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할 만한, 그리고 수학적으로 매우 아름다워질 세계에 관심이 있다.

책을 보면서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우선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칼텍 캠퍼스에 꼭 가보고 싶다는 것이다. 특히 파인만과 겔만이 있었다는 그 층과 주변 풍경, 자연 경관이 그곳의 학문적인 분위기와 더불어 너무 생생하게 묘사되어 마치 내가 그곳에 있는 관찰자가 된 느낌이었다.

두 번째로는 글쓴이의 고민이 정말 절절하게 다가왔다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내면적으로 인생의 성공을 꿈꾼다. 그러나 드러나 보이는 성공을 위해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일에 매달려 재미없게 살 수도 있고, 또는 성공해야 한다, 무언가 나의 존재 가치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강박 관념 때문에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가치없는 일에 가치를 부여하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며 살 수도 있다. 파인만은 세계 최고의 물리학자이지만 그런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였고, 오로지 무지개를 바라보며 느꼈던 아름다움, 그리고 전자 현미경 사진을 보면서 느꼈던 떨림과 경외감에 의해 일생을 살아갔던 사람이었다. 글쓴이는 파인만을 통해, 자신이 칼텍에서 뛰어난 업적을 내야 한다는 부담감에서 벗어나, 작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나는 어떠한가 하고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내가 최상위 집단에만 속해있었지는 않았다. 그러나 내가 속한 집단들 안에서 나는 비교적 선두 진영에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선두 진영에 있었던 것이 진짜 나의 실력과 노력과 상상력과 끈기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우연한 발견이나, 행운에 의한 기회 포착에 의한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의문은, 미래에는 낙오자나 실패자가 될 수도 있다는 불안으로 연결되기도 하였다. 암으로 죽어가면서도 죽음에 대해 별로 걱정하지 않고, 그냥 물리학 문제에만 매달려 사는 파인만은 그런 걱정에서 벗어나 진정 삶의 행복을 선택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 같다. 진짜 가슴이 뛰고, 재미있는 일에 매달리라는 것이다. 그러한 선택 자체가 이미 성공한 것이니, 그 결과가 세상 사람들에게 무엇을 줄 것인지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세 번째로 나는 이 책을 보면서 내가 만났던 많은 스승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이 대학 때 은사님이었던 정 선생님이다. 정 선생님은 어떤 면에서 파인만과 비슷해보이는 구석이 꽤 있는 분이었다. 외모에는 신경을 안 쓰는 듯한 털털함, 한 가지에 집중하면, 시간 관념이나 옆 사람 존재에 대해서도 까먹어버리는 집중력, 그리고 어떤 새로운 문제가 나와도 특유의 뛰어난 통찰을 통해 문제의 핵심에 빠르게 접근해가는 예리함이 그랬다. 자기 제자들에게까지 2년이 지나면 추천서를 안 써주겠다고 먼저 편지를 보내는 파인만의 괴상한 취미를 닮지는 않으셨지만서도. 어쨌든 스스로 학생의 스승이기를 거부하고, 학생 지도에는 관심도 없고, 오로지 자신의 연구에만 관심있는 파인만과, 학생들의 창의적인 생각을 고양시키려고 애쓰셨던 정 선생님은 사뭇 다르면서도 비슷한 데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우리 시대 사회에서 가장 존경받고 지성인으로 추앙받는 대학 교수님들이 과연 진짜 지성인으로서의 제 몫을 다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미국에서는 대학 교수직도 다 계약제여서 성과가 없으면 계약이 끝나버리는데, 우리 나라는 사실상 암묵적인 종신제를 택하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 대학 교수라는 직함은 어떤 분야에서나 전문가로 대접받는 최고의 명예직인 것 같다. TV의 토론 프로그램마다 (그 분야의 전문가인지 잘 모르겠지만) 대학 교수가 나오지 않는 곳이 없고, 정부 기관, 기업, 연구소 등에서 행하는 각종 평가, 사업마다 대학 교수가 무슨무슨 자문 위원, 평가 위원으로 빠지지 않는 곳이 없다. 그리고 그들은 이미 교수라는 직함을 달자마자 최고의 전문가가 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전문성에 대해서는 더 이상 평가받거나, 의심을 받을 일이 별로 없다.

잠깐 이야기를 딴 곳으로 돌리면, 파인만은 불행하게도 심리학적인 이야기를 끔찍이 싫어한다. 번역서에 심리학적이라고 나온 것이 진짜 psychological인지 아니면 mental이나 spiritual 또는 emotional인지 모르겠다. 어쨌든 파인만은 수학적인 엄격함을 통해 사물의 원리를 발견하는 물리학과 대조적으로 심리적인 것, 정치적인 것을 싫어했다고 한다. 그가 말하는 정치와 심리란 아마도, 논리적, 과학적 근거가 없이 단지 주장만 앞서는 것들에 대한 통칭이 아닐까 싶다. (사실 심리학은 과학적 근거를 매우 중시하는데...쩝...)

자, 이제 많은 대학 교수들이 파인만이 말하는 과학에 더 전문가인지, 아니면 혹시 아주 일부라도 파인만식 표현으로 '심리학'이나 '정치'의 전문가인지 생각해본다. 물론 특정 집단 사람들을 싸잡아서 이렇다라고 매도하는 것은 매우매우 위험한 생각이다. 하지만 혹시 우리 나라의 지식 구조가 대학 교수라는 폐쇄적 집단에게 지나치게 독점되거나 의존적이었던 것은 아닐까 의심해볼 필요는 있는 듯 하다.

별 생각없이 집어든 책이었지만, 짧은 글 속에서 깊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던 책이었다. 인생의 나아갈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매는 사람들에게, 답을 주지는 못하지만, 파인만식의 인생관(파인만은 아마도 이런 단어 자체를 달갑지 않게 여길지도 모르겠다.)은 좋은 참고가 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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