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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승식의 다른 생각 (보관)

책과 영화 박완서 장편소설, 그 남자네 집

신승식 2005.05.25 00:08 조회 수 : 30849

 
그 남자네 집 책표지 책을 여러 권 사놓고, 돌려가면서 읽다가 다른 책들은 지겨워서 흐지부지하고 끝까지 재미있게 읽은 책이 그 남자네 집이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내가 살아보지 못했던 시대들에 대해 맛깔스런 해설을 곁들인 흑백 드라마를 본 느낌이 역시 그 남자네 집에서도 비슷했다. 단지 다른 점이라면 많은 사람들이 관심있고 재미있어 하는 연애라는 주제가 다루어졌다는 것이다. 전쟁통에도 서울 거리를 낭만적으로 보이게 했던 첫 사랑의 그 남자, 현보가 주인공의 현재 남편이 될 줄 알았는데, 정말 예상 밖으로 주인공은 딴 남자에게 시집을 갔다. 그러나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결혼 후에도 남아있는 그 남자에 대한 기억이 세월이 흐르면서 한 때는 바깥 바람으로 실현될 듯하기도 하고, 또 어느 순간 잊혀졌다가, 불현듯 그 남자의 소식을 들으면서 숨어있는 감정이 다시 격해지기도 하다가, 시대가 바뀌고, 주인공의 삶도 현실에 따라 바뀌어가면서 이제는 완전히 지난 일로 묻히게 된다.

이 이야기를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났다. 세상을 온통 아름답게 보이게 하고, 심장을 뛰게 만드는 첫 사랑이 세월이 가면서 어떻게 변해가는지...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알 수가 없어서 없어졌던 것 같았던 뜨거운 감정이 어느 순간 제어할 수 없는 뇌와 심장의 떨림으로 다시 살아나는지... 그리고 소위 요즘 세대 입장에서 보면, 구시대의 우리 어머니, 우리 할머니들도 우리와 비슷한 젊은 청춘을 그 난리통에도 우리와 비슷하게 지나왔다는 것... 그리고 그런 청춘은 결혼을 하고, 애를 낳고, 시집 살이를 하고, 한옥집이 양옥집이 되고, 양옥집이 아파트가 되면서 어떻게 긴 세월을 견뎌왔는지...

이야기는 많은 개인들의 삶으로 채워져 있다. 숨어있는 화냥기, 순간순간 싫어지는 남편, 시어머니, 어떤 때는 민망하거나 챙피한 엄마 등을 거침없이 토하면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의 주변에는 다른 많은 사람들의 평범하지만 안타깝고 기구한 삶들이 겹쳐있다. 평생을 은행원으로 살면서 한 가정의 경제를 책임져야하는 의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남편, 첫사랑에게 뒤통수를 맞고, 엎친데 덮쳐 시력을 잃었지만 다시 그럭저럭 살아가는 듯해 보이는 현보, 미군부대에 취직하여 잘 나갈 듯 했으나, 결국 마지막까지 사랑다운 사랑을 못해보았다는 춘희, 박수무당의 말을 금과옥조로 삼고 아들의 삶에 자신의 행복을 내던져버린 시어머니, 그리고 근본이 있는 집을 강조하면서도 생활 전선에서 하숙을 쳐서 매섭게 살아가는 엄마 등...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가 결코 아주 특별하지도, 그러나 아주 전형적이어서 뻔할 뻔자도 아니게 적당히 흥미있고, 적당히 박진감있게 전개되고 있다. 결국에는 사람 사는 이야기인데, 그것이 한 번쯤 겪어보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옛날엔 이랬다더라라고 한 번쯤 들어보았을 법한 현실감있는 우리의 시시콜콜하면서도 심각한 인생 이야기여서 다른 어떤 소설보다 읽는 재미가 더했다.

마지막으로, 국내 작가들의 소설 읽을 때마다, 두 세 페이지마다 모르는 단어가 하나씩 나오는 나의 빈약한 어휘 실력과 작가들의 풍부한 어휘력, 표현력에 놀란다. 그래서 영어 공부 할 때에도 어휘력이 곧 그 사람의 지적인 힘과도 비례한다는 말이 새삼 실감난다. 이 세상의 복잡하고 미묘한 사건과 사람의 감정, 행동을 보다 정확하게, 보다 근사하게 나타낼 수 있는 단어들이 아직 널려있고, 그런 것들을 하나씩 더 앎으로써 세상에 대한 이해의 폭도 더 넓어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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