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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승식의 다른 생각 (보관)

책과 영화 화련한 현대적 사극, 왕의 남자를 보고

신승식 2006.01.22 00:11 조회 수 : 115732

 

왕의 남자 영화 포스터회사에서 젊은 사람(?)들의 비공식 모임에 간신히 턱걸이(?)로 끼여 처음으로 지난 주에 영화를 보러 갔다. 각자 보고 싶은 영화를 봤는데 요즘 화제인 왕의 남자를 드디어 보게 되었다.

최근에 본 영화가 거의 없기도 하지만, 아무튼 상당히 인상적인 수작이었다. 영화 내내 계속되는 광대 놀이, 그림자 놀이, 경극, 궁중 음악 등 화려한 시청각 거리와 어울려 한 번 공연을 할 때마다 비극이 펼쳐지는 비장함과 긴장, 그리고 등장 인물들간의 기묘한 연민, 질투, 사랑 등이 겹쳐지면서 한 마디로 설명하기 힘든 감정을 갖게 하였다. 그런 면에서 왕의 남자는 사극이지만, 아주 고전적인 사극에서 선과 악이 비교적 뚜렷이 구분되고, 영웅과 악당의 대립 구도에서 영웅의 승리를 간절히 바라는 진부함이 없이, 그 어느 누구도 절대선도 아니고 절대악도 아니며, 그 누구도 단순하고 명쾌하게 이기지 못하고, 그 누구도 완전히 지지 않는 복잡함을 잘 묘사한 지극히 현대적인 영화였다. 사람들에 따라서는 이 영화를 동성애의 코드로 보기도 하고, 영화 전체의 주인공을 장생으로 보기도 하고, 연산으로 보기도 하고, 또는 공길의 메트로섹슈얼한 이미지가 영화의 하이라이트라고 하기도 한다.

나도 영화 속 공길의 모습에 상당히 매력을 느꼈다. 여자보다 더 아름다운 남자라서? 물론 공길이 우락부락한 남자로 등장했거나 못 생긴 남자로 등장했다면 지금과 같은 매력을 풍기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극에서 공길의 매력은 그의 깨끗하고 아름다운 얼굴선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그의 눈물에 있었다. 왕의 남자에 나오는 주요 인물들은 대부분 시대가 요구하는 본인의 신분과 역할에 부적응적이다. 절대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연산은 스스로 자신의 권위를 깎는 자유분방한 풍류가로서의 기질과 생모에 대한 아픈 추억에 얽힌 폭력적인 행동으로 인해 신하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불행한 왕이었다. 광대로서의 장생도 예외는 아니어서 그는 조선 시대의 일개 시골 광대로서 감당할 수 없을만큼 너무 똑똑해서 너무 사태를 빨리 파악하고, 너무 끼가 있고, 권력 앞에서도 너무 직선적이다. 그래서 연산의 인생도 장생의 인생도 봉건적인 조선 시대에 자신들에게 강요된 역할에 의해 모두 비극으로 빠지고 만다.

그렇다면 극중에서 장생과는 사뭇 다른 모습의 공길은 어떠했는가? 그는 봉건적인 시대에 광대라는 신분의 한계와 요구되는 행동 규범을 알고 그냥 그것을 받아들인다. 그래서 양반들이 자신을 가지고 놀아도 감히 대항하지 못한다. 그래서 나약한 그에게는 겉으로 보기에 더 강해서 외부의 위협을 막아줄 장생이라는 동반자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영화 초반에 장생이 죽을 고비에 처했을 결정적인 순간에, 공길이 예상치 못한 과감한 행동으로 장생의 죽음을 막아줌으로써 공길이 결코 나약하고 무기력한 광대가 아니라는 것을 암시해준다. 그리고 그것은 영화 후반에도 공길의 매력으로 내내 남는다. 공길은 장생처럼 대놓고 대항하고, 반항하고, 소리지르지 못한다. 그러나 공길에게 숨겨진 놀라운 힘은 바로 겉으로 큰 소리 치고 권력을 휘두르거나 권력에 휘둘리는 사람들의 내면의 아픔과 감성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능력이었다.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폭군처럼만 보이는 연산의 내면에 숨겨진 예술가적 기질과, 그런 기질의 배후에 있는 연산의 고독하고 아픈 과거를 빠른 시간 안에 공감하고 눈물흘릴 수 있었던 이, 그가 바로 공길이었다. 자신의 동반자이자 믿고 따르는 형님같은 장생이 연산에게 오해를 사, 죽을 고비에 쳐했을 때, 그는 다시 눈물로 호소하여 장생의 목숨만은 살게 된다. 또한 광대패를 보고 장단에 눈이 멀어 광대가 된 장생이 진짜로 평생 장님이 되어버린 기구한 그의 운명에 진정으로 슬퍼하고 공감해주는 사람도 공길이다. 반면에 공길의 이러한 눈물은 장생의 날카로운 풍자와 어우러져 끔찍한 비극을 부를만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도 가지고 있었다. 연산은 공길의 눈물 섞인 비극을 보고 과거에 눌렸던 잔인한 기억을 되살리게 되고, 결국에는 현실에서 또 하나의 비극을 만들어내고 만다. 그리고 공길은 자신의 눈물에 의해 현실에서 벌어진 기막히고 참담한 결과에 다시 눈물을 흘린다.

내가 왕의 남자를 재미있게 보았던 이유는 여자처럼 예쁜 꽃미남 공길 때문이기도 했지만, 소극적이고 수동적이며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은 듯 하면서도 남의 내면의 아픔을 자신의 것 이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여주는 뛰어난 그의 공감 능력과 섬세한 감성 때문이지 않았을까? 아무튼 화려하면서도 비극으로 치닫는 영화 속 주요 인물들의 이야기가 가슴을 아련하게 아프게 한 감동적인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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