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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승식의 다른 생각 (보관)

책과 영화 [영화] 라이터를 켜라 : 왕따, 영웅 되다.

신승식 2002.08.06 21:00 조회 수 : 30572

 
라이터를 켜라 영화 포스터 왕따가 영웅이 되는 길

'라이터를 켜라'라는 영화를 봤다. 음, 처음부터 어떤 내용의 영화인지 사전에 아무런 정보가 없이 보았기 때문에 비교적 몰입해서 재미있게 보았다. 흔히 말하는 조폭 영화(예를 들면 조폭 마누라, 친구)라고 하는 것들, 또는 조폭과 코미디가 결합된 영화들(예를 들면 주유소 습격사건, 신라의 달밤)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유형의 영화이므로 '라이터를 켜라'도 그런 류의 영화이겠지 하고 별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그냥 스트레스나 풀려고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갔다.

난 영화에서 허봉구라는 인물이 솔직히 처음에 불쌍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반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던 봉구는 성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취직도 못하고 아직 친구들에게 놀림받는 백수이다. 조금이라도 백수를 지내본 사람들은 이 백수가 얼마나 비참한지 안다. 편하다고 우기면 할 수 없지만.

그런 봉구에게는 탈출구가 없어보인다. 세상은 철저하게 잘난 사람들과 힘센 사람들, 있는 사람들에게만 편하고 자유롭기 때문이다. 예비군 훈련에 갔다 오는길에 그는 버스비에서 단돈 50원이 모자라서 집에 오는 버스를 타지 못한다. 그리고 아는 친구들에게 전화를 해서 자기좀 데려다 달라고 해보지만 그것도 소용이 없고.

한 번은 나도 차비가 떨어져서 집에 가지 못한 적이 있었다. 대학원 시절이었다. 부산에 학회가 있어서 내려갔다가, 괜시리 서울에 일이 있다고 일찍 나왔는데 터미널에 와보니 아뿔싸, 호주머니에 돈이 없는 것이다. 시간이 밤 10시가 넘어서 현금 인출기도 찾기가 쉽지 않고, 괜히 한 3000원 남은 돈을 현금인출기 찾아가는 택시값으로 날렸다. 그러고 나니 땡~전 한 푼 없게 되어버렸다. 결국 한일은행 되는 인출기는 찾지 못했고, 지금부터 서울에 올라가는 사람들 붙잡고, "저 죄송한데요. 제가 서울에 가야 하는데 차비가 떨어져서요..." 라는 말을 해보는데, 어쩌면 "일 없어요."라고 외면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야속해보이던지. 하긴 나도 터미널에서 그런 식으로 돈달라는 사람들을 사기꾼으로 보았었지 진실로 보았던 적이 별로 없었으니까. 그래서 그 날 밤은 터미널 대합실에서 잠을 청하는데. 터미널에서 잠자는 웬 아저씨들이 그리도 많을까. 그들도 나와 비슷한 처지이거나 아니면 더 비참한 처지일텐데, 그래도 옆에 있는 사람이 반갑기는 커녕, 혹시 나쁜 사람이 아닐까 하고 무서운 경계의 대상이 되어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영화속의 봉구는 정말 단순하고 순진하다. 흔히 영어로 나이브(naive)하다는 표현이 그에게 어울리는 것 같다. 마지막 남은 300원으로 구입한 일회용 라이터를 찾기 위해 그는 거대한 힘에게 겁도 없이 달려든다. 그리고 라이터를 찾겠다는 그의 단순한 꿈은 마침내 엄청난 댓가와 희생을 치르고 이루어진다. 게다가 덤으로 그는 이제 더이상 왕따가 아니라 수백명의 목숨을 구한 영웅이 된다.

우리의 현실 세계에서 봉구와 같은 인물이 영웅이 되는 길은 좀처럼 발견하기 힘들다. 한 번 왕따는 영원한 왕따이고, 왕따가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편안해하고 행복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그 왕따가 무대에서 조용히 사라지면, 사람들은 다시 새로운 왕따를 찾아 나선다. 그리고 그 새로운 주인공을 실컷 왕따시키면서 주류 사회의 단결력을 한껏 과시하고 즐거워한다. 진중권은 '엑스리브리스'에서 우리 사회를 '-1의 사회'라고 했다. 반드시 한 사람의 왕따가 있어야 유지되는 사회.

봉구처럼 왕따가 영웅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는 왕따가 안 될 것이니까 걱정 없다고 안심할 수 있을까? 그러나 지금도 어떤 집단에서는 무대에서 사라진 왕따를 이을 새로운 후계자를 뽑고 있을지도 모른다. 순진한 사람들이여, 봉구처럼 라이터 찾으려고 무모하게 거대한 힘에 도전하지 말라. 이것은 영화일 뿐, 현실에서는 당신을 새마을호 열차 밖으로 내던져버릴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