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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승식의 다른 생각 (보관)

책과 영화 그시절 누나들의 삶: 봉순이 언니

신승식 2003.02.06 21:00 조회 수 : 19061

 
봉순이 언니 책표지공지영의 봉순이 언니를 선물받았다. 다른 책을 보느라고 그냥 팽개쳐놓고 있다가 설 연휴 때에 펼쳐보았는데 이야기가 정말 재미있어서 거의 눈을 떼지 않고 끝까지 다 읽을 수 있었다.

우선은 작가의 능력에 대한 놀라움과 경외감을 감출 수 없다. 자신의 어렸을 때 기억을 바탕으로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듯이 세밀하게 흑백 사진을 찍어서 보여주는 것 같은 서울의 신촌을 중심으로 한 묘사가 기가 막혔다. 물론 나는 그 시절에 태어나지도 않았고, 서울에는 당연히 와보지도 못했지만, 책 속에 나온 동네의 꼬불꼬불한 골목이며, 또 거기에서 오밀조밀 장난치며 떠드는 아이들의 모습이며, 모든 것이 눈앞에 좌악 펼쳐지는 느낌이 들었다. 또 하나 놀라운 점은 봉순이 언니로 대표되는 그 시절 '식모'의 전형적이면서 비극적인 삶을 처절하게 사실적으로 잘 잡아낸 것이었다. 가난 때문에 농촌에서 서울로 올라와 기껏 선택할 수 있었던 길이 '공순이'나 '식모'밖에 없었던 우리네 누나들은 바보같이 그렇게 막다른 골목으로 골목으로 몰릴 수 밖에 없었다.

지은이의 사실상의 어렸을 때의 모습인 '짱아'는 능청스러우면서도 영악한 계집애로 처음 사람 경험이 바로 자기 집의 식모 '봉순이 언니'였고 그 언니와의 인간적인 정도 운명의 뒤틀림에 의해 결국에는 멀어질 수 밖에 없게 된다. 그리고 미국 유학을 다녀온 엘리트 아버지 덕분에 남들보다 먼저 '아파트'에 입성할 수 있게 되고, '식모' 대신에 '파출부'를 고용하는 집에서 살게 된다.

자칫 비극적이기만 하고 끝나버렸을, 그래서 한없이 아쉬운 회상에 푹 빠져버렸을 글의 끝머리에 지은이는 '끔찍한' 일말의 희망을 끄집어내는 것을 잊지 않는다.

"... 그런데 날 더욱 뒤돌아 볼 수 없게 만들었던 건, 그건 그 눈빛에서 아직도 버리지 않은 희망...... 같은게....... 희망이라니, 끔찍하게....... 그 눈빛에서...... 비바람치던 날, 이상한 생각에 내가 문을 열었을 때 두 발을 모으고 애타게 날 바라보던 메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