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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승식의 다른 생각 (보관)

책과 영화 전쟁의 기억, 기억의 전쟁

신승식 2003.06.06 21:00 조회 수 : 18883

 
전쟁의 기억, 기억의 전쟁 책표지 얼마전 지구의 날 행사장에서 산 책이었는데, 회사일이 바빠서 계속 미루고 있다가 며칠 전에 읽게 되었다.

21세기가 되고도 몇 년이 지나버린 지금, 새삼스럽게 베트남 전쟁을 이야기하는 이유가 뭘까 궁금했었다. 과거와 역사 속에 묻혀져버린, 박정희 시대의 이야기, 그리고 잘은 모르지만 월남 패망에서 보듯이 혼란스런 사회는 공산화된다는 교훈을 섬뜩하게 각인시켜준, 우리나라 경제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고 하는 그 전쟁. 저자는 그 정도로만 알고 있는 나에게 베트남 전쟁 이야기를 차근차근 들려준다.

'나와 우리'라는 시민 단체에서는 매년 베트남 답사를 한다. 왜일까? 한류 열풍이 불고 있는 그곳에 가서 선진 한국인으로서의 자존심을 한껏 확인하고 싶어서일까? 김대중 전 대통령이 한국이 본의 아니게 베트남 국민들에게 고통을 안겨주었던 과거의 사실에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사과한 것으로 부족한 것일까?

우리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과거의 침략 전쟁에 대해서 반성하지 않고 망언을 하는 것을 규탄하고 비난한다. 그리고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해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하지 않고 적당히 돈으로 떼우려는 일본 정부에 대해서도 비난한다. 노근리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도 정확히 인정하고 사과하지 않는 미국을 규탄한다. 그러면 한 마을에서 민간인 수 백명이 일시에 떼죽음을 당한 베트남 곳곳에서의 우리 국군의 과거 행위에 대해서, 역사적인 사실로 인정하고, 사과하였는가?

베트남 어느 마을에 증오비가 서있다고 한다. "하늘에 가 닿을 죄악 만대를 기억하리라"로 시작되는 한국군에 대한 증오를 담은. 그러나 답사팀이 그 마을에 갔을 때에 베트남 사람들은 과거를 잊고 미래를 준비하자는 베트남 정부의 정책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한다.

전쟁은 어떤 이유이건, 어떤 종류이건 인간성의 극단적인 파괴와 말살을 가져온다. 어떤 명분도 설득력이 없는 베트남전에 젊은이들이 파병되어 군인 개인에게도, 그리고 베트남 사람들에게도 추악하고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 상처는 아마 시간이 가면 조금씩 아물겠지만, 상처를 준 행위에 대해 정확히 인정하고 사과하고, 반성하지 않는다면,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또 도드라지고 아플 것이다.

노무현 정부는 엊그저께 미국 스스로 '더러운 전쟁'이라고 하는 이라크 침략 전쟁에 우리의 젊은이들을 내보냈다. 전쟁이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와 지속적인 고통을 주는 가장 비인간적인 폭력이라는 것을 노무현은 생각해봤을까? 그리고 베트남 전쟁과 6.25 전쟁의 상처로 인한 아픔이 얼마나 오래가는지 생각해봤을까?

'국가',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권력과 집단 광기는 과거 일본으로부터 침략을 당한 경험이 있는 '대한민국'에서도 얼마든지 재탕, 삼탕 나타나 다른 '국가'에 대한 무자비한 폭력, 그리고 '국가주의'에 동조하지 않는 개인에 대한 집단 따돌림으로 나타날 수 있다. 얼마 전에 유시민 의원이 '국민 의례'에 대해 시비를 걸었다가 된통 당한적인 있지 않은가? 또, 월드컵 때에 태극기를 온몸에 두르고 '국가'의 이름 네 글자를 열광적으로 노래하지 않았던가? 월드컵에 열광하고 뭉치는 것이 그렇게 고무적이고 즐거운 일이었을까? 혹 그 이면에 '우리가 남이가?'라는 섬뜩한 국가주의와 집단주의가 숨어있는 것은 아닐까? 작년에 미국에 출장갔을 때에 국경일도 아닌데 많은 일반 가정집에서 성조기를 걸어놓은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던 적이 있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자랑스러운 세계 제일의 나라 미국에 대한 '애국심', 그리고 그런 나라의 '국민'이라는 '자랑스러움'의 표현이었겠지만, 나에게는 왜 그것이 전율을 느낄만큼 섬뜩하게 보였을까?

네이팜탄과 고엽제를 쏟아부었던 베트남전에서처럼 미국이 미사일을 퍼부었던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의 상처는 아마 깊고 길게 남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저 TV 속에서 나오는 전쟁 게임, 유가나 주가와 같은 '경제'에 영향을 주는 민감한 이벤트 정도였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