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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승식의 다른 생각 (보관)

책과 영화 21세기식 단편: 김훈의 화장 외

신승식 2004.04.04 12:51 조회 수 : 31882

 
2004년도 제 28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책표지 아마 처음이 최일남의 '흐르는 북'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배운 13인의 아해가 등장하는 시를 보고 충격과 감동을 받고, 막연히 이상이라는 작가에 대한 동경이 일던 시절에 이상 문학상 작품집을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흐르는 북을 읽고 작가 최일남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리고, 거의 매년, 한국 단편 문학의 '트렌드'를 얄팍하게 한 큐에 파악하고 싶은 욕심에, 그리고 생각보다 훨씬 끌리는 단편 소설의 재미에 빠져 이상 문학상 작품집을 샀었다. 80년대 말 임철우의 '붉은 방'은 암울하고 어두웠던 시절에 문학이 나타낼 수 있었던 잔혹한 현실 묘사였었다. 그리고 양귀자의 '숨은 꽃'을 전환점으로 다시 90년대식의 혼란 시대로 넘어갔었던 것 같다. 가장 혼돈의 기억의 정점에는 93년 최수철의 '얼음의 도가니'가 있었다. 군대를 마치고 대학 캠퍼스에 돌아온 당시에, 나름대로 고민스러웠던 사회/정치적인 문제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난해한 흐름에 의해 압도되어있었다. 단순한 선악의 이분법과 군대에서 배운 권위에의 순종과 굴복, 그리고, 권력을 이용한 불도우저식 밀어붙이기 사고를 체험하고 막 돌아왔던 나에게 캠퍼스의 햇볕은 너무나 눈부셨고, 교지에 실리는 '포스트모던한' 글들은 너무 난해했다. 그리고 그 때에 나온 난해하기 이를 데 없는 '얼음의 도가니'를 읽으면서, 군대에서 굳어져버린 내 머리를 탓해야 했다.

그러나, 시간은 빠르게 21세기로 바뀌었고, PC통신을 통해 등단한 '엽기적인 그녀'로 상징되는 2000년대식 가벼운 터치의 글들이 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2004년이 된 지금, 순수 문학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있는 이상 문학상 작품집에 실린 것들에도 변화가 느껴졌다. 이번 작품집을 읽으면서는 80년대식의 심각한 현실 의식과 90년대식의 난해한 포스트모더니즘, 2000년대의 재미와 쿨함이 모두 한 작품에 녹아들어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비발디의 사계, 파헬벨의 캐논, 영화 클래식에 나오는 귀에 착 달라붙는 아주 고전적이고 어법에 맞는 음악도 듣고 싶지만, 때로는 프로코피에프 좀 더 나아가서 말러나 쇼스타코비치, 서태지의 음악, 영화 박하사탕에 나오는 긴장된 불협화음이 더 '땡기는' 때도 있다. 그러나 여전히 현대 음악이라는 이름이 붙은 메시앙, 윤이상의 작품들은 난해하고 멀게만 느껴진다. 마찬가지로 나는 90년대 중반까지 포스트모더니즘과 조금이라도 관련된 소설을 보면서 나의 감성적인 둔감함을 한없이 탓하였다. 그러나 21세기가 되자, 80년대식의 고발과 직설도 아니고, 90년대의 몽상과 현학도 아닌 2000년대식의 새로운 문학판이 벌어졌고, 그것이 오늘 덮은 김훈의 화장이었다.

김훈은 작품 수도 많지 않은 '신인'이라고 한다. 최근에 대통령이 김훈의 '칼의 노래'를 읽는다고 해서 세간의 화제로 떠오른 작가이기도 하다. 2004년 작품집을 산 지가 꽤 되었는데, 회사일에 몸과 마음이 시달리고, 어쩌다가 남는 시간은 피곤함을 달래기 위해 쉽게 손이 가는 TV와 잠으로 보내느라고, 모셔놓기만 하고 있었다. 그러다 마침 식목일을 낀 3일 황금 연휴가 와서, 지지부진했던 책을 다 읽을 수 있었다. 단편을 읽는 재미는 중장편과 다른 짜릿함과 끝날 때 허공을 바라보며 다시 입맛을 다시는 아쉬움에 있다. 이번에 실린 작품들은 정말 다른 주제로 새로운 짜릿함을 주었다. 그 중에도 기억에 남는 작품은 김승희의 '진흙 파이를 굽는 시간'이었다. 어찌 보면 의식의 흐름에 따라 이야기가 왔다갔다 하며, 할 이야기 못 할 이야기를 마구 쏟아내는 것 같고, '엽기적인 그녀'에서 봤던 네티즌과 현대인들의 너무나 한국적인 젊음과 가벼움의 터치가 있는 듯 하면서도, 단편 소설이 일관성을 가지고 문학적인 재미를 주기에 충분한 정교한 틀과 진지한 끌어당김이 빠지지 않아, 21세기식 소설의 재미를 가져다주었다. 물론, 대상 수상작인 김훈의 '화장'은 그런 가운데 백미였다. 죽어가는 아내의 몸과, 신입사원으로 들어온 젊은 여자, 추은주의 몸, 안락사해서 죽을 운명인 개, '보리'의 몸, 그리고 전립선염으로 날마다 병원에서 오줌을 빼야만 하는 주인공, 오상무의 몸의 이야기가 교묘하게 교차하면서, '몸짱'이라는 단어가 유행하는 21세기 사회의 화두를 놓치지 않았으나, 그 화두에서 몇 단계는 뛰어넘어 정교하게 짜여진 뜨개질감을 보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파헬벨 캐논의 규칙 부합에서 오는 만족감과, 쇼스타코비치 교향곡의 미묘한 음의 도약에서 오는 불쾌하면서도 더 흥미를 자극하는 유혹이 이야기 속에 복잡하게 녹아들어가 있었다. 21세기의 신인류는 비발디만으로, 그리고 서태지만으로 만족하지 못하며, 그만큼 까다롭다. 그런 의미에서 김훈의 '화장'은 분명히 걸출한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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